안종우 AHN Jongwoo는 기억과 기록을 주제와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기억의 불완전성과, 이를 보완하는 장치로써의 기록에 주목하며 작가는 ‘사진’을 기본 매체로 기억과 기록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한다.

안종우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그의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미국 버지니아주로 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한국으로 돌아왔던 작가는, 처음 마주한 한국의 인상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부모님에게는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작가에게는 ‘처음 온 낯선 곳’이었던 한국의 서울 생활은 어린 작가에게 쉽지 않았던 듯하다. 오리는 처음 마주한 대상을 어미라고 생각하고 따른다고 했던가. 처음 말을 배우고 문화를 접하고 익히며 친구를 사귀고 뛰어 놀았던 ‘고향’ 미국 땅을 타의(부모님의 뜻)에 의해 떠나 가족 말고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새로운 낯선 곳에서 새롭게 적응하고 살아내야 했던 “무력한” 여섯 살 안종우가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은 “그 곳에서 가져온 나의 기록과 흔적을 매일같이 살펴보며 곱씹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틈틈이 찍어둔 비디오와 사진들, 버지니아에서 가져온 이삿짐들은 낯선 ‘부모님의 고향’으로 돌아온 어린 소년이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니, 도와준다고 생각했었다. 선명히 오래 갈 것이라고 믿었던 어린 종우의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새로운 경험이 또 다시 새로운 기억으로 함께 쌓여가면서 겹쳐져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기억은 단순히 희미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겪고 기억했던 것들과 다른 이들(부모님)의 시선으로 기록된 과거를 보며 꺼내진 기억이 뒤섞이면서 기억은 재구성되고 때로는 재창조되어 변형되고 왜곡되기까지 했다. 기억을 반복해서 기억해내며 자신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능한 완전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어린 소년의 노력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기억을 수복하기 위한 전투”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리고 짐작건대 일상의 수많은 일들과 맞물려 우선 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면서 퇘색해 갔고, “수많은 질문과 함께 저 바다 아래로 침몰해 버렸다*”.

희미해진 기억을 잡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식의 바다 저 깊은 곳으로 침몰해 숨어있는 기억을 다시 인양해 물 밖으로 끌어내려고 애쓰는 것은 비단 안종우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도, 당신도 내용과 정도는 다를지언정, 분명히 그런 경험이 있다. 안종우는 이런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작업으로 시각화하며 미술이라는, 예술이라는 공적인 영역으로 가져온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기억에 대한 집착과,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된 기록에의 집중은 끊임없이 작가를 질문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는 왜 자꾸 이렇게 기록하고, 기록된 것들을 반복해서 복기하며, 기억하려고, 또는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가. 왜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어떤 기억은 흐릿한가. 이 기억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실존했던 일이긴 한 것일까. 기억은 어디까지 정확하고, 또 어디까지 부정확한 것일까… 기억 속의 나는 정말 실존했던 존재인가, 실재했던 것일까, 실존은 무엇이고 실재는 무엇인가. 여섯 살 소년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기억의 복기와 기록 읽기를 통한 기억 보존에의 노력은, 이제 성인이 된 작가로 하여금 보다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인간은 기록을 한다. 인류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역사는 반드시 기록의 역사인 것은 아니다.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촬영하거나, 음성으로 녹음하거나 동영상으로 촬영(녹화)해 두지 않았을 지라도, 각 개인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억으로 담아 둔다. 각 개인이 경험하는 것들은 그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 기억이 되고 저장된다. 한 개인의 역사는 이렇게 시간과 함께 쌓인 기억의 역사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서, 지각하여 겪은 일들을 모두 빠짐없이 담아 둘 수 없다. 더욱이 인간의 기억은 미묘하고 신비로워서, 입력했던 정보를 꺼내는 과정에서 기억의 일부가 유실되기도 하고, 변환되기도 한다. 이 기억의 유실과 변환(혹은 왜곡)은 의도적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렇게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기억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간은 기록을 한다.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지고 또 사라졌던 기억이, 남겨진 기록을 통해 상기되어 다시 깨어나고, 보완되어 유실될 뻔했던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고 더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기억의 불완전성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한 개인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그 개인이 세상에서 삶을 마치면 그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담겨있던 것들은 전적으로 그 혼자만의 것이어서,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 유실을 막기 위해서, 한 개인의 기억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기록하고, 이 기록들이 모여 인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록들을 통해,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기록은, 개인의 기억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내가 (개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이 실존했던, 실재했던 사실을 증명해준다. 모든 기록은, 어떤 누군가의, 한 개인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안종우가 <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땅으로 자라는 나무 A Tree Growing Down>에서 관심을 가지며 시각화하는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자 사회의 기억이며, 인류의 기억이다. 우리의 기억을 보완해주는 기록 수단으로 안종우는 사진 photography에 주목한다. 사진은 그가 작가로서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주요 기록수단으로 사용해 온 친숙한 매체이다. 비단 사진은, 아니 카메라camera는 안종우에게 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손쉽고 편리한 기록수단이다. 불과 50여년 전만 해도 카메라는 매우 특별한 물건이고, 또 교육받은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예민한 매체였다. 초점도, 셔터 속도도, 노출도 모두 수동으로 잘 맞춰야만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에, 카메라는 대중적인 기록 수단이라기 보다는 특별하고 귀한 기록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안정감 있는 구도로 선명하게 찍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술로 소비될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러나 20세기 말 보급형 자동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누구나 특별한 기술 없이도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고,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카메라의 가격 또한 대중화되면서 사진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기록 수단이 된다. 그로부터 겨우 이 십여 년 뒤인 21세기 오늘, 스마트폰의 발달과 함께 우리는 거의 전 세계인이 모든 순간을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사진으로, 그리고 동영상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며, 그렇게 기록한 개인의 기억을 타인과 공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진으로 작업을 한다면, 이제 기계가 할 수 있는 기술적인 것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무엇인가로 그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안종우는 여기에 주목한다. 더 이상 사진에서 구도와 선명도는 예술적 가치 척도의 수단이 아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포착이 사진에서 제일 중요하던 시기는 이제 지났다. 그렇다면 사진에서 예술적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누구나 사진을 쉽게 선명하게 찍고, 좋은 구도를 잡아내고, 사진으로 인쇄print해 내는 지금과는 달랐던, 사진이 특별했던 시절, 사진이 처음으로 발명되었던 원형으로 돌아가보자고 생각했다. 힘겹게 촬영하고, 힘겹게 인화하던 초창기 사진의 기법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기계’가 하는 모든 과정을 사람이 ‘손’으로 직접했던 그 시절의 기법들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안종우는 지극히 아날로그적 초기 기술인 검프린트와 시아노타입cyanotype 청사진 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냥 원래의 기법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은 작가에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일이었다. 남들과 다른 사진 작업을 하고 싶었고, 남들이 해보지 않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었으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그는 검프린트에 동양화 재료인 분채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작업이었기에, 작가는 실험에 오랜 시간을 쏟아야 했다.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렸다고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특별한 결과를 얻기 위해 빠르고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느리고 어려운 길을 간다. 안종우의 분채 검프린트는 이런 예술가적 태도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기계가 쉽게, 게다가 빨리 잘 해내는 일(인쇄)을 굳이 사람이, 손으로, 힘을 들여 노동하며 어렵게 해낸 결과물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함을 만들어 내는 일 말이다. 사진이지만 그림 같고, 사진이지만 동양화처럼 느껴지는 안종우의 분채 검프린트는 수제手製, 핸드메이드Hand Made가 높이 평가되는 오늘, 과정의 특별함과 결과물의 시각적 특별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지극히 매력적인 작업으로 다가온다. 분채 검프린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작가가 이야기하는 시아노타입 역시 작가의 ‘손’이 개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어떤 현대적 사진보다 인간적이고, 나아가 회화적인 결과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끈다. 보편적이고 평범할 수 있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이례적이고 특별한 작품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게 만드는 것은, 기계를 대체한 작가의 ‘손’과 노동, 그리고 그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남다른 감각이다.

안종우의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은 전술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가의 역작이다. 우모레기는 안종우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동경팔경>에서 언급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사실 우모레기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는 아니다. 한자로 매목埋木, 땅 속에 묻혀 화석화된 나무를 뜻하는 일본어 우모레기うもれぎ 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처지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억과 기록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어쩌자고 버림받은 처지라는 뉘앙스를 가지는 단어를 선택한 것일까. 더구나 <동경팔경>에서 우모레기는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설의 제목으로 단 한 번 언급될 뿐이다. 안종우는 우모레기가 “땅에 묻혀 있는” 존재라는 것에 주목한 것 같다. 게다가 우모레기는, 한 때 생명을 가지고 살아갔지만, 이제는 생명력이 꺼진, 죽은 존재이다. 그런데 보통 죽어서 땅에 묻힌 유기체라면, 세월이 흐르면서 분해되어 흙이 되기 마련인데, 우모레기는 살아 있을 때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화석화되면서 오히려 살아있을 때 보다 더 단단해졌다. 땅 속에, 지층 아래에 묻혀 있으니 땅을 파서 드러내기 전에는 우리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기억이 그렇다. 기억은 보이지 않는 채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로 깨어난다. 나 스스로 기억해 내기도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나기도 한다. 우모레기는 마치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저장되어 있는 기억과 같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기억을 ‘시각화’하는 안종우의 작업에 우모레기는 꽤 그럴듯한 제목이다.

안종우의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에는 다양한 명화들이 등장한다. 카라바지오의 점쟁이(The Fortune Teller, c.1595), 장-레옹 제롬의 하렘의 욕장(Piscine dans un harem, 1876),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쉬케와 아모르(Psyché et l’Amour, 1798),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하녀(The House Maid, 1910), 요하네스 코르넬리스 페르스프른크의 마리아 판 스트라이프의 초상(Portrait of Maria van Strijp, 1652) 등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혹은 고전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다양한 시대의 인물화에서 따온 얼굴과 몸이 등장한다. 고전classic은 원형이며, 이상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그 시대를 살았을 누군가의 얼굴이고, 몸이고, 그것의 기록이다. 최소한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실재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떠났고, 기록(그림)만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그림들의 모델들도 모두 실존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모습은 이미지로 기록되었고 남겨져 있지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도, 그림으로 그려진(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 그러나 기록으로, 누군가의 기억에서 기반한 기록으로 우리는 이들의 실존을 추정하고, 믿는다.

안종우의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의 각 화면은 명화에서 차용한 몸 이미지에, 80년대 미국 홈쇼핑 카탈로그에서 발췌한 몸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조선 고서에서 발췌한 글씨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에디토리얼 editorial작업이다. 앞서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해서 선명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하며 때로 재구성되고 변환되며 왜곡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렇게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재구성하는 과정을 안종우는 에디토리얼, 편집적이라고 본다. 우리 머릿속에 혼재해 있는, 묻혀있는 기억의 조각들, 분절된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 와 취사선택하여 재구성하는 에디토리얼, 편집작업 말이다. 작가의 기발표작 기록역사 History Documentation iii (2024)연작은 이런 분절된 기억 조각들을 편집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을 시각화 한 것이었다. 기록역사 iii이 물리적으로 기억을 새로 만들어서 그 기억이 분절되고 편집되어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면, 우모레기는 기존의 기록에서 우리가 어떤 기억을 ‘인양’하고 이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각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기록과 기억은 나(작가)의 것일 수도 있고, 타인의 것일 수도 있으며, 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얼굴과 몸의 이미지를 발췌해 온 고전적 성격을 가지는 회화 작품들은 타인의 기록이고 기억이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고 기억이다. 한편 80년대 미국 홈쇼핑 카탈로그에서 발췌한 얼굴과 몸의 이미지는 유년 시절을 보낸 버지니아를 고향으로 여기는 작가의 사적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시대 고서에서 붓글씨를 따온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부인할 수 없는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기록이며, 그에 연관된 기억에서 온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재료. 소재에는 ‘신체’, ‘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왜 몸 the human body일까. 안종우는 기억과 기록을 다루는 작업에서 몸에, 특히 손에 집중하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야 가장 분명한 실존의 확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것은 오감 五感을 통해서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입으로 맛보며, 손(피부)로 느끼며 바깥 세상을 감각하고 이해하는 인간, 안종우에게 가장 분명하고 생생한 기억은 몸에 닿아 느끼는 촉각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되면 꼬집어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들리는 게 다가 아니지만,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분명한 실존이다. 살로 이루어진 나의 신체가 없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만지고 느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살에 닿아 느껴서 기억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본 기억도 손에 닿은 것처럼 기억할 수 있을까.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결과이다.

안종우는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에서 이미지를 필사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진에서 이미지 필사라니, 도대체 어느 과정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바로 네거티브 필름에 작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기계가 충분히 훌륭한 이미지의 네거티브 필름을 생산해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종우는 네거티브 필름에 일부 이미지를 손으로 직접 옮겼다. 손으로 옮겼지만, 기계적인 반복 동작으로 옮겼다. 기계적 과정에 인간의 온기를 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이미지 필사는,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에서 촘촘히 그어진 사선으로 이미지 부분이다. 손끝으로 닿은 기억만이 분명한 기억이고, 이를 통해 본인의 실존을 확인한다는 작가는,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기억에 사선을 그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손의 촉각적인 기억을 더하며 또 다른 방법으로 기억을 편집하고, 기억한다. 기억의 저 너머 땅 속에, 지층 아래 묻혀 있을 기억들은 끄집어 내지고, 눈에 보여지면서 다시 기억되고, 동시에 손 끝으로 만져지면서도 기억된다. 진정한 기억의 편집, 에디토리얼이다.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에는 이렇게 복합적인 기억이 에디토리얼로 보여진다. 고전적 명화로 기록하고, 기록된 시대의 기억, 그 명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사적 기억, 80년대 미국 홈쇼핑 카탈로그에 기록된 그 시대의 기억, 그리고 이를 보며 꺼내질 작가의 사적 기억, 조선시대 고서에 담겨있는 그 시대의 기록과 기억, 그리고 이에 대한 작가의 사적 기억, 그리고 이 작업으로 기억을 기록하며 작가가 저장했을 또 다른 사적 기억. 이 많은 기억들이 작가의 선택에 따라 분절되고(crop), 크기가 커지고 작아지며, 선명해지고 또 흐려지고, 노이즈로 둔탁해지고 또 가려지며 그렇게 기억은 편집되고, 재구성되어 간직되고 또 변형되며 왜곡된다. 이 모든 기록과 기억은 우리의 몸이 감각하고 인지하며 저장되고 다시 끄집어 내진다. 그렇게 우리는 실존하고, 그리고 언젠가는 소멸한다. 어쩌면 우모레기처럼 우리는 소멸한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혹은 기록 속에 매장되어 있다가 끄집어 내지고, 그렇게 우리가 실존했던 사실이 또 누군가에 의해 다시 기억되고, 기록되고, 그렇게 우리의 인류는 살아가고 계승되는 것일게다.

너무 거창해진 것일까? 아니다. 안종우의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은 낯선 듯 익숙하고, 어려운 듯 쉽다. 거창한 듯 단순하고, 단순한 듯 심오하다. 이 모든 것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다시 부모님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온 여섯 살 소년의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귀국이지만, 실제로는 강제 이주를 당한 여섯 살 소년의 혼란은, 훗날 스스로를 디아스포라diaspora 같다고 느끼는 성인으로 성장하여 기억과 기록에 대한 질문을 학문적이면서 시각적으로 연구하고 실험하게 하였다. 작가가 기억과 기록에 집착하고, 이를 확인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은 결국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작가의 담담한 고백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다양한 문화와 환경의 변화를 겪은 기억이 얼마나 강렬하게 오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은 작가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학문적 연구와 탐구를 거쳐 시각예술로 승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과 기록에의 집착에서 시작하여, “기억은 손에 닿을 수 있는가” 질문하며, ‘손’과 ‘촉각’에서 ‘몸’이라는 키워드로 자연스럽게 넘어와 가장 이상적으로 인간의 몸을 ‘시각화’한 고전주의 시대의 인물화를 자신의 ‘손’과 기계라는 상반되는 두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손’의 움직임을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문자기록인 붓글씨를 발췌하여 몸으로 기록한 이미지들에 더하며, 작가의 사적 경험과 기억을 구성해주는 버지니아 고향시절을 상징할 수 있는 80년대 미국 홈쇼핑 카탈로그에서 발췌한 몸 이미지와 텍스트 기록들을 더하여 복합적인 기록과 기억을 에디토리얼로, 편집적으로 시각화한 안종우의 우모레기 UMOREGI 埋れ木 The Buried Forest 연작과 분채 검프린트 작업들은 우리에게 기억과 기록, 그리고 개인과 인류의 실존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한다. 땅 속에 묻혀 죽어 있을 기록과 기억을 지층 위로 끌어 내 새로운 기록과 기억을 만들어 줌으로써 죽은 기록과 기억을 되살려 생명력을 불어 넣은 안종우의 우모레기 연작은 동시에 시각적인 매력으로도 충만한데, 이는 순전히 작가가 타고난 재능에 후천적인 노력으로 연마한 본능적이면서도 세련된 감각 덕분이다. 눈과 머리가 동시에 바삐 움직이게 만드는 작품들 앞에서, 작가가 손 끝에 닿게 하고자 했던 기억을 느껴본다. 손 끝이 움찔움찔 하다. 그렇게 나는 살아 있고, 실존한다.